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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원 칼럼 성경 난해구절 해설

성경 난해구절 해설

히브리어 지상강좌 (2) - 태초(2) 2018/05/14 (07:12) 조회(4102) 한국히브리신학원
복음신문 히브리어 지상강좌 (2) - 태초(2)
 
 
태초 (2)

  존재로서의 태초개념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어지는 처음을 뜻하는 것이다. 시간으로서 태초개념은 해와 달과 별이 처음으로 시작된 자연현상의 처음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현상으로서 태초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로서의 태초는 모든 사람 각 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문이 열리는 처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개인 각 사람마다 태초가 다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해서 믿은 믿음의 연조는 몇 십 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문이 열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태초가 없는 것이다. 태초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마음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참생명이 태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일해 나가시는 ‘날’(욤)의 역사는 존재할 수가 없다. 오늘날이라고 하는 시간은 진행되어 갈수가 없다. 그에게 표면적인 신앙생활의 연조의 나이는 계속해서 먹어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면의 영적나이는 먹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영혼은 자라가는 것이다. 신앙의 축복은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으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많아지고 그 생명이 충만해지므로 그 생명이 사람의 생각을 정복하고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고 통치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분량까지 자라나가는 것이다. 태초가 없는 그에게는 계속해서 오늘날이라고 하는 시간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가 변화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는 봄절기에 주저앉아 바리새인적인 신앙생활만을 답보하고 있을 뿐이다. 태초가 시작되지 않으면 종교행위는 있으나 영혼이 살쪄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은 무저갱 상태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 자신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혼은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간다는 왜곡된 개념을 버려야 한다. 영혼이 자라고 살쪄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 태초가 없다면 천국은 시작될 수가 없다. 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아울러 천국은 못 가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의 시작은 ‘베레쉬트’다. 성경은 태초에서 시작이 되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를 ‘베레쉬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레쉬트는 태초, 근본, 머리라는 뜻이다. ‘베’는 전치사 ‘~안’을 말하고, ‘레쉬트’는 명사․여성․단수이며 어근은 ‘로쉬’인데 머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베레쉬트는 머리 안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의도하신 그 높은 이상이 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베레쉬트 안에서 일을 해 나가신다. 하나님께서는 ‘베레쉬트’안에 계시면서 일을 해 나가신다. 하나님이신 ‘엘로힘’은 일을 하시는 것이고 ‘베레쉬트’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베레쉬트를 하시고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신 ‘엘로힘’은 계속해서 ‘베레쉬트’를 창조하시고 계신다는 말이다. 다시 쉽게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의도하신 그 높은 이상인 머리로 피조물인 인간의 생각의 머리를 바꾸는 창조의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일을 과거에만 하시고 그치셨는가?’ 아니면 ‘현재에 하시고 계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창조하신다는 ‘바라’는 동사인데 현재동사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현존하시는 실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하신다는 ‘바라’의 현재동사 속에 계시는 것이다. 인간인 모든 사람 속에서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 계속 창조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는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이 바로 하나님의 실존 그 자체가 되신다. 피조물을 양육하시는 아비가 베레쉬트다. 피조물 속에 바탕으로 깔려서 일하시는 어미가 ‘바라 엘로힘’이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이 피조물의 아비어미가 되신다는 말이다. ‘엘로힘’은 피조물 속에 바탕으로 자리를 잡고 계신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간에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이상에는 그 속에 하나님이 어미로서 바탕으로 자리를 잡고 계신다. 그러나 피조물은 바탕으로 자리 잡고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가면서 하나님이 자신 속에 바탕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점점 확실히 알아가게 되는데 하나님을 분명하게 아는 만큼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존재가치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인식하고 분별하여 마음문을 여는 태초 안에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닮아가도록 자라게 하는 아비의 양육 장소가 태초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물 속에 들어와야 태초가 시작되게 되고 창조적인 개척을 통해 영혼이 자라날 수 있는 여건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람의 생각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근본의도하신 그 사상으로 사람의 생각이 바꾸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머리가 바꾸어지는 역사가 진행되게 되는 것이다.

  태초인 ‘베레쉬트’는 ‘바라’(창조하다, 베어내다, 양육하다)와 ‘쉬트’(놓다, 두다)의 두 동사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은 이 두개의 동사 속에 동적인 일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진행해 나가신다. 먼저 ‘바라’를 생각해보면 창조하다, 베어내다, 양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계획하신 그 높은 이상인 머리를 배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배운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