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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원 칼럼 성경 난해구절 해설

성경 난해구절 해설

히브리어 지상강좌 (34) - 넷째 날 (1) 2014/07/02 (11:24) 조회(2342) 한국히브리신학원
복음신문 히브리어 지상강좌 (34) - 넷째 날 (1)
 
 
  넷째 날 (1)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그 높은 뜻을 법으로 세워놓은 것이다. 이 세우신 법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다. 이 법으로 기름 부어 주시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넷째 날에 피조물에게 넘겨주셔서 삶 속에 익히고 적용하고 실천해 나가게 하므로 그 법과 하나로 결합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넷째 날이라는 말은 ‘욤 레비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기름부음으로 넘김 받아서 나와 하나로 결합하여 동침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첫째 날은 둘째 날로, 둘째 날은 셋째 날로, 셋째 날은 넷째 날로 반복해서 통과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가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법으로 기름부음 받고 대답하는 얼굴이 많아지고 열매 맺고 하나님의 얼굴로 충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자라가면서 살이 쪄 간다는 말이다.
 
  첫째 날 ~ 셋째 날은 그리스도, 넷째 날 ~ 여섯째 날은 예수다
 
  예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예수아’다. 구원하다, 해방하다, 자유를 준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미완료 상태를 말한다. 예수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을 기름부음으로 넷째 날에 넘겨받고 통과해서, 다섯째 날 여섯째 날로 통과해 가면서 인간 내면에 거하고 있는 육의 속성들을 깨뜨려 소멸시켜 나가는 것이다. 깨뜨려지고 소멸된 만큼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교환되어 가게 된다. 이 교환되어 가는 과정에서 구원이 미완료 상태에서 완료 상태로 자라가는 것이다. 영혼이 살쪄가며 자라가는 것이다.
 
  완전 구원단계에 이르기까지 구원은 미완료 상태로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구원을 미완료 상태에서 완료 상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육의 속성들을 반복하는 익힘의 훈련을 통해 깨뜨리고 소멸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예수를 미완료라고 하니까 놀라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 ‘예수여!’하고 소리치고 불러대는 이름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라는 이름의 개념이 올바르게 정립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름의 개념이 바르게 세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이 세우신 법과 하나로 동침 하여 삶 속에서 적용하고 익히며 실천해가는 반복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육의 소욕들을 깨뜨리고 영혼이 자라가며 살쪄가 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 아니라 일평생 삶을 영위해 가면서 예수가 완성되어가므로 예수를 맛보고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을 죽어서 요단강을 건너가는 곳으로만 알고 있다면 천국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도 현재, 하나님도 현재, 그리스도 예수도 현재 실존으로 존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창세기 1장의 내용이요 성경 66권의 잣대가 된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이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다. 아울러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의 내용이 그리스도 예수의 실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이 성경 66권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잣대가 없이는 성경 66권을 풀어 나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 66권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만을 말씀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인간의 몸으로 비하된 분으로만 개념을 고착시키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믿음을 형식으로만 걸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느니, 그리스도 예수는 설화라느니 사단의 소리를 거침없이 하게 된다.
 
  믿음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가 걸어가신 생명의 본체길을 걸어갈 수 없다. 믿음으로 신령한 눈이 열어져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눈먼 소경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신랄하게 꾸짖었다. 그들이 왜 꾸짖음을 받았는가를 신령한 눈이 열려져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닌가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다. 천국 가는 생명의 본체길로 들어서는 지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인 첫째 날에서 셋째 날의 기름부음을 받고도 넷째 날에서 그 기름 부어진 법과 하나로 결합되어 동침을 하지 않고 적용하고 익혀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삶 속에 믿음의 능력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를 걸어가며 육신의 소욕을 깨뜨리고 소멸시켜가는 것인데 이 구원의 완성길을 걸어가지 않고 있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는 사라지고 육신이 썩는 냄새만 나는 자들이다.